Sunday, June 24, 2018

What Makes Americans American: Yellowstone National Park

For five days, Su and I drove to and from Yellowstone National Park.  It is a 1,000-mile trip from Southern California.  On the way we stopped by Zion National Park for two days, so indeed we spent just one full day at the America's first National Park.  A few things struck me during the trip.

National park experience is an American way of expressing a widespread longing to get away from the sameness of everyday and to recapture the relation to the planet.  The biggest thing which seems to me to make American National Park experience distinct and even eccentric is that we "drove" through the park: the concept of National Park in the US revolves around driving, another key component of most Americans' individuated lifestyle.  Essentially the entity you tour with through the landscape is defined by a vehicle you drive.  You drive, park, take photos, read descriptions in panels, ponder on geologies, get on the car, and drive to the next destination as the road leads.  You view the scenery from your car, or even eat and sleep in the car.  Some national parks have tram or shuttle bus systems, where their landscape hardly allows enough space for parking lots.

wild animals (bison) seen from the car window at the Yellowstone. The gap created between human and the wild felt so wide.

William Zinsser, the author of American Places: A Writer's Pilgrimage to 15 of This Country's Most Visited and Cherished Sites (1992), suspects that the reason why so many Americans are eager to visit the Yellowstone has something to do with "ownership," especially "family possession."  You, as a child, make a visit with your parents; by yourself becoming a parent you lead the family visit.  The renter-car manager also told me that he visited the Yellowstone when about 10 years old.  As George Greenia (2014) calls, the national park visit seems to have become an American cultural pilgrimage.

Zinsser also interestingly mentions about the history of the park.  Nathaniel P. Langford in the Washburn Expedition of 1870 to the soon-to-be national park wrote about "feelings of mingled awe and terror" which recalled him his "entire dependence upon that Almighty Power who had wrought these wonders."  Langford's talk in Washington, D.C. inspired politicians to create a "Yellowstone National Park," leading to, on March 1, 1872, President Grant to sign the first bill setting aside wild lands "for the benefit and enjoyment of the people" under the management of the federal government.

hundreds of people are waiting for the "faithful" Old Faith to spring up.

It is also interesting to see the early connection with the military service at the park management.  Before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Park Service in 1916, for about 30 years the army managed the Yellowstone and protected it against poachers and mischievous tourists.  The soldiers later quit the army and served under the Park Service as lifelong rangers.  The pseudo-militarization of park service and sheriff-styled ranger service characteristic to the American national park system seem to have originated from this early connection. 

Yet Zinsser, and the bulletin of Yellowstone National Park as well, does not mention the thousands years of Indian residence in the area.  For the several decades since the inception, the Park had deliberately ignored and misinformed the presence of American Indian tribes inside the park.  The killing of several dozens of American Indians in the process of making the park has long been ignored.  The system of National Park, in the US and around the world, is still relying on the idea that a non-human place demands superintendence from human forces in order to remain intact and "natural."  

The idea of National Park in the US is therefore ironic: a human-created non-human area to be enjoyed under voyeuristic eyes from cars.  

Friday, June 22, 2018

님 웨일즈의 <아리랑>

아리랑 (The Song of Ariran, 1940, 일어판 <아리랑의 노래>, 한국어판 1984년 동녘 1판, 1992년 개정1판, 1993년 개정2판 발행. 조우화 역)


뜨겁고 처절하면서도 명철한 철학에 바탕을 둔 김산의 생애를 1인칭 시점으로 흥미진진하게 그린 저작이다. 김산의 세계관과 인간관의 일부를 적어본다.

이 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필명: 님 웨일즈, 1907~1997)가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공산주의 혁명가 장지락(1905~1938, 이하 책에서 사용된 이름 김산)을 몇 차례에 걸쳐 인터뷰하고 쓴 책이다. 1937년 김산이 32세일 때 역시 30세에 불과한 작가 사이에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는 인터뷰와 저작으로 이어진다. 


혁명가의 눈으로 본 1930년대 동북아 정세와 혁명가의 삶과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 집요하고 활발하게 진행된 항일투쟁은 전반적인 배경을 형성한다. 한 예로 1935년에만 조선에 주둔한 총 22만에 달하는 일본 경찰병력이 체포한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은 20만 명을 넘었다. 그만큼 30년대 조선은 "일본인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는 비수"(304쪽)였던 것이다.

김산의 독특한 성격은 책 전반에 강렬하게 흐른다. 김산은 스스로도 "용서를 모르는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로베스피에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그래서 정적도 많고 모함도 받았다. 결국 인터뷰가 있었던 바로 다음 해 반혁명, 간첩 혐의로 동료 공산주의자들에게 처형당하고 만다.


책의 제목 '아리랑'은 김산에게 "죽음과 패배의 노래"(232쪽)다. 일본의 감옥에 갇힌 당시 와세다대학 출신의 일본 사복형사가 인터내셔널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하자 김산은 거절하며 아리랑을 부른다.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이유다. 그가 "부를 수 있는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이는 아리랑이었다. 

노래 아리랑이 김산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천여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된 신의주에 있는 감옥에서 김산은 이전 수감자들이 벽에 손톱과 수갑으로 써 놓은 낙서들을 읽는다. 군데 군데에서 아리랑 가사도 많이 있었다.

이런 죽음과 패배를 숱하게 몸으로 겪으며 김산은 스스로에게 국가에 대응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국가와 나는 대등" (232쪽) 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가장 큰 사상가를 꼽으라면 마르크스와 톨스토이다. 김산은 마르크스주의에 정통한 혁명가, 교사, 저술가로서 십여 년의 처절한 활동 동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근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민중들이 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296쪽)

30세가 되었던 어느 날, 아주 똑똑한 20대 중국 여성 공산당원과 토론하던 도중 그는 스스로가 무척 늙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정신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어느 일정한 지점까지 가면 인간정신의 성장은 정지하고 그 이상 신장되지 않으며,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미 옛날이야기인 10월혁명에 대한 향수에 빠져들게 된다." (298쪽) 서글픈 이야기다. 그러나 강렬했던 "10월혁명"의 추억에 견줄 새로운 사건을 스스로의 삶에서는 더 이상 도모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추억으로 회고하려는 것뿐이지 않을까. 즉 성장의 한계는 세상을 알아 나감으로써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성숙이겠다.

김산의 혁명적 깨닮음은 마르크스보다도 마르크스의 변증론을 전 인류에 대한 인간애로의 성찰로 이끈 톨스토이에게서 더 짙게 묻어나온다. 김산은 중학교 때 처음 톨스토이를 접한 이후 줄곧 톨스토이의 저작들을 품에 간직하며 거의 매일같이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김산이 이해하는 톨스토이는 "현실을 여러 가지 모순의 충돌이라고 묘사한다." (125쪽) 즉 "작중인물은 언제나 투쟁하고 있으며, 절대로 동의와 해결에 도달하는 법이 없다." (125쪽) 따라서 김산의 톨스토이 이해는 혁명으로 나아간다. "현실의 이 변증법적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명확하게 행동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125쪽) 이처럼 변해가는 현실이란 자연도 또 자아도 포함된다. 김산은 "변화하는 자연"을 좋아했으며 인간의 본성도 이처럼 변하는 것이며 또 변해야 한다고 봤다.

그렇다면 삶의 진리도 변하는 것인가. "나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무엇이 정이고 무엇이 사인가,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잘못인가 하는 것을 논함으로써 사람을 단죄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299쪽) 1933년 북경의 차디찬 감방 안에서 그는 다짐한다. "타인의 거짓말이나 변절을 절대로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나 자신의 방식으로 하다가 설령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게 그 실패는 명예이고 승리인 것이다."(271쪽) "내가 묻는 것은 무엇이 가치있는 것이고 무엇이 낭비인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쓸데없는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가 하는 것이다.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오류는 인간 발전의 통합적인 일부분이며, 사회변화 과정의 통합적인 일부분인 것이다. ... 사람들은 실험을 통하여 비로소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299-300쪽)

김산의 인생관, 인간관은 비관론의 유희다. "나는 불행한 사람들을 좋아한다."(253쪽)고 선언한다.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이 내게는 멍텅구리처럼 보인다."(253쪽) 아! 이 책을 통틀어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내게 가장 와 닿는 말이었다. 모든 것이 손에 가깝고 편리로 가득차, 삶의 의미와 목적, 질곡과 그를 벗어나 새 하늘을 보려는 소망까지 모든 것에 벽을 쌓아두고, 삶의 의미를 물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세상의 끝이 바로 이곳 미국에 있었다. "그들은 삶의 표면 위를 날아다니고는 있지만 절대로 그 의미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 그들은 인간의 참마음에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고 고립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들이 즐거운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 (253쪽)